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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 로이교육재단 이사장님 재인천서산시민회 인터뷰

작성자 : 관리자 (IP: *.121.122.191)    작성일 : 2019-12-11 15:28   읽음 : 0





내 고향 서산, 어머니의 호흡과 닮은 곳!

“언제까지나 버팀목이 되어 서 있는 ‘재인천서산시민회’가 있기에 결코 나는 외롭지 않다”





재인천서산시민회 이우영 회장(재단법인 로이교육재단 이사장)


일반적으로 인터뷰 기사는 인터뷰 기자와 인터뷰이의 대화 형식을 띤다. 하지만 재인천서산시민회 이우영 회장의 인터뷰 글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써 내려갔다. 다소 파격적인 형식이지만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기 위해 택했다.


#프롤로그



어느 날 인터넷에서 펠리컨 새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자기희생과 모성애의 상징인 펠리컨은 새끼에게 줄 먹이를 구하지 못하면 자신의 살을 뜯어 먹인다고 한다. 또한 새끼가 병이 들면 자신의 살을 쪼아 그 피를 먹이고 어미의 피를 먹은 새끼 펠리컨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살아나게 된다.


이 기사를 보는데 나는 갑자기 우리 부모님이 오버랩 되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내 고향 팔봉, 모성애를 그대로 빼다 박은, 내 어머니의 호흡이 묻어있는 곳. 아직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품고 있는 소확행이 바로 내 고향 팔봉이다. 급변하는 산업화 속에서도 여전히 내 기운을 돋게 하고 나를 일으키게 하는 에너지가 있기에 나는 오늘도 타지에서 당당히, 멋지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01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 344번지,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은 8남매를 낳았지만 태어나자마자 전염병에다 여러가지 시대적 상황때문에 안타깝게도 5남매를 잃었고, 결국 나는 1남 2녀 중 막내가 되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주로 늦은 나이에 학교 입학을 했지만 나는 어쩐 일인지 7살 이른 나이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덕에 누님들의 손을 잡으며 신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42살에 나를 얻은 아버지는 외아들이 ‘부모 품에 있으면 자립심이 없어진다’는 염려 때문에 겨우 4학년인 나를 수원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비록 당신들은 배우지 못했지만 자식만큼은 ‘땡볕에서 일하지 않고도 배부르게 먹고 살도록 해줘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옛말에 흉년이 되면 ‘어미는 굶어 죽고 아이는 배 터져죽는다’고 말했던가. 당신들의 삶은 비록 퍽퍽할 지라도 자식만큼은 가르쳐야겠다는 그 일념하나로 버틴 우리 부모님, 그 고귀한 정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02



그렇게 나는 부모님 손을 잡고 수원으로 가기위해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외지에 떨어져 외롭게 혼자 살아야한다’는 걱정보다 팔봉에서 서산까지 걸어 나가야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먼저 나왔다. 하지만 서산에 도착하여 막상 부모님과 함께 완행버스에 몸을 싣고 수원으로 올라오는데 라디오에서 옛날 노래가 구슬프게 나와서일까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이제가면 언제 또 만날까 복받치는 울음 때문에 창밖만 연신 바라보았다.


그때 내 눈에 비친 음식점 이름들, ‘평양옥’ ‘아산옥’ 등... 그런데 참 이상하다. 왜 그때 그런 이름들이 내 눈에 들어왔을까. 나는 그것이 유관순 누나가 ‘감옥’ 속에 갇혔던 그런 옥(獄)인줄 알고 ‘야~ 여기는 ‘옥(獄)’이 참 많구나. 유관순 누나가 이런 옥 속에 갇혀 죽었다니!’라고 뜬금없이 생각했다. 어느덧 내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어 있었고 대신 내 눈은 호기심으로 연신 창밖을 보며 새로운 미지의 세상을 감상하기에 바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도 초등학교 4~6학년 학생들이 1주일동안 합숙교육 차 ‘영어마을’에 들어오면 학부모들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준다. “부모님이 아이들 걱정되어 보고 싶을 뿐, 의외로 아이들은 뛰어 놀고 즐겁게 공부하다 보면 (부모님생각)잊어버린다”고.



#03



내가 그랬다. 평상시에는 학교생활에 젖어 있다가 방학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면 그때부터 미치도록 부모님이 그리워졌다. 그럴때면 제일 먼저 짐을 사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그러다 다시 풀고 학교에 가고, 또 (짐)사고, 그러기를 여러 번 하다보면 그토록 그리운 내 고향 팔봉으로 가는 날이 온다. 마치 무슨 병처럼. 방학만 다가오면 나는 그런 행동을 반복적으로 했다. 어쩌면 ‘그립다’는 것은 대상을 생각할 때, 그때서야 미치도록 그리운 건 아닐까.


그렇게 방학이 시작되었고 나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부모님 품에 안겨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동안 있었던 학교생활이며 친구들 이야기를 하나하나 털어 놓았다. 마치 정채봉 작가의 시 “엄마,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처럼.


나는 그렇게 어렸고,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 초등학생이었다.



#04



하지만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남달랐다. 어린냥을 하는 아들에게도 농사일은 물론 동네 친구들과 나서서 땔감을 해오도록 시키셨다. 말 그대로 우리 아버지로서는 이것이 ‘배우는 사람들도 남들 하는 것은 다 해야 한다. 좀 배웠다고 껍적대지 말라’는 일침이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사건이 있다. 그날도 또래 친구들과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산 위에서 정말 실컷 놀았다. 그러다 저녁때가 되어 나무는 해가야 하는데 급한 김에 땔감을 미처 긁지 못하고 소나무 가지를 잔뜩 잘라 지게에 지고 집으로 갔다.


사실 소나무를 자르면 혼이 나던 시절이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도 야단을 치지 않았다. 다음날도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작업을 했고 나는 속으로 ‘이상하네 금방 (소나무가지)툭탁 쳐서 지고가면 될 텐데…….’라며 전날과 같이 소나무 가지를 잘라서 집으로 갔다.


3일째 되는 날,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내 손을 잡고 산으로 데리고 가더니 나무 하나를 가리키며 “우영아, 이 나무는 어디에 썼으면 좋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귀찮아서 대충 나오는 대로 얘기를 했고, 그때 아버지는 “이 나무는 소멍에를 만들면 좋겠다”고 하셨다. 소멍에는 마소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 목에 거는 막대를 말하는데 나는 아버지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퍼뜩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길로 꺾어진 나무를 가져다 소멍에를 만드시면서 “만약에 반듯한 나무였다면 구부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쓸모가 있는 법이란다. 그러니 함부로 자르지마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으며 사람마다 각각의 재능과 장점을 찾아내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고개를 숙이며 깊이 뉘우쳤다.


지금도 이것은 교육철학의 모태가 되어 교육자로서 걷는 내게 깊은 울림의 종소리로 남아 있다.



#05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인천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을 했다. 좀 커서인지 제법 적응을 잘 하던 어느날, 지금까지도 마음에 상처가 되는 일이 생겼다. 그때가 5교시 영어시간. 식곤증으로 피곤하고 졸린 그 시간에 선생님은 어제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읽기를 시키셨다. 나는 속으로 ‘내가 제법 영어를 잘하나 보다’고 생각하며 당당히 읽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충청도 발음이 재미있기 때문에 아이들 잠을 깨우기 위한 수단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 창피하여 그날 이후부터 영어시간에는 아예 입을 다물었고, 결국 그 시간이 싫어 운동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누군가 내게 “영어마을을 왜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충청남도 서산에 살았기에, 서산 사투리로 영어책을 읽었기에 영어마을이 탄생됐다”고 말할 것이다.



#06



학창시절 여러 가지 일들이 중간중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시골에서 자식만을 위해 죽어라 농사짓는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중·고·대학교를 누구보다 열심히 다녔다. 하지만 돈도 빽도 없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무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시골에서 온 부모님은 “이왕이면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나는 26살에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부푼 꿈을 안고 학교에 왔지만 당시 학생들의 진학에 대한 고뇌를 보면서 차마 교사로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가는 진학률이 미처 30%가 되지 않았다. 대학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70%에 대한 아이들, 나는 그 아이들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안정된 교사직을 그만두고 ‘행복한 사회인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직업전문학교를 만들었다. 결국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로이교육재단도 모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아이들이 행복해야할 권리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 실용전문학교와 직업전문학교 등 교직원 400여명과 10개의 산하 전문교육기관을 둔 로이교육재단이 되었다.



#07



직업전문학교라는 단어를 보면 지금도 나는 가슴에 물소리가 난다. 그것은 바로 ‘팔봉직업전문학교’. 아버님을 기리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첫 학교의 이름을 팔봉직업전문학교로 지었다. 팔봉에서 태어나셔서 팔봉을 사랑하시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의 아호(雅號)도 팔봉으로 지어드렸다. 팔봉, 팔봉이란 단어는 나에게 큰 의미이자 울림이었다.


지금도 한 달이면 두어 번 즐겁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그리고 유난히 보고 싶을 때, 훌쩍 팔봉 내 집으로 가 집 뒤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내 아내가 잠들어 있는 산소를 찾아 위안을 받곤 한다.


10년 전 내 곁을 떠난 아내도 그곳에 묻혀있다. 우리 부모님은 끔찍이도 아내를 사랑해 주셨는데…….


나는 지금도 주말부부가 내려가는 것처럼 양손에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약주 한 병과 내 아내가 유난히 즐겨 마셨던 커피를 사 들고 간다. 어머니는 꽃을 참 좋아하셨는데 커피 옆에는 늘 꽃도 빠뜨리지 않고 준비해 가 안겨드린다. 어머니 덕분에 그곳에 잠들어 계시는 모든 분들이 호강을 하도록 말이다.


나는 때로 바보처럼 아내가 누운 자리에 앉아 넋두리도 해본다. ‘여보, 시아버지 시어머니 사랑받으며 있으니 외롭진 않지? 좀 일찍 가고 늦게 가는 것뿐이야. 다들 언젠가는 가잖아. 나도 고향 찾아 당신 옆에 갈 것이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내일이 어디 있기나 한가. 눈뜨면 내일이 있는 것이고 눈을 뜨지 않으면 없는 것인데……. 그렇게 열심히, 후회 없이 살면 되는 것을.



#08



그래도 참 다행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의미 중에서 가장 아련한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서 말이다. 역시 타지에서 가장 큰 위안은 고향사람들인 것 같다. 내게 향우회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다.


꽤 오랫동안 부회장으로 있다가 2018년 나는 재인천서산시민회 회장으로 취임을 했다. 가만보면 객지는 삶의 현장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장에서 힘들어 할 때 누가 나를 위로해 주겠는가. 바로 우리 고향 사람들이 언덕이 되어주고, 엄마의 품이 되어주며, 서로 안아주고 기대주면서 함께 버팀목이 되어 서 있어 주지 않은가. 또한 이것이 먼 곳에 있으면서 해야 할 우리들의 몫이다.


늘 마음속 연인처럼 (고향)그리워하다보니 참 감사한 일도 생겼다. 바로 내 고장 팔봉의 ‘팔봉감자축제’ 명예 위원장으로 18년 동안 봉사할 수 있게 된 일이다. 작은 힘이나마 뭔가 도와줄 수 있도록 기회를 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이 벅찬 와중에 ‘애향 및 지역선양’에 도움을 주었다고 출향인에게 주는 서산시민대상자로 선정되어 영광스러운 상도 받았다.


부끄럽지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려고 산소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제일 먼저 “그래 잘 했다”고 말해주는 듯해서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팔봉초 후배들과 노인회 그리고 이장단에서 플래카드를 붙여줬는데 이 큰 덩치에 플래카드 앞에서 사진을 찍으니 괜히 울컥하기도 했다.


‘아 이게 사는 것이구나!’ 이 나이에 그렇게 감동을 받은 적도 아마 드물 것이다.



#09



선배는, 그리고 후배는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그냥 마음으로 연결되어있는 단단한 고리인가 보다. 매년 팔봉초 후배들이 영어마을캠프에서 만나는데 (후배들)보기만 해도 엄청난 에너지를 주고 간다.


주위사람들이 “왜 팔봉이라면 목숨을 거냐?”고 종종 내게 묻는다. 나는 말한다. “팔봉은 내 가족이 기다리고 있고 내게 피와 살을 주었으며 내게 안락함을 주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내 아내는 이미 10년 전에 시골 팔봉으로 내려가 부모님 곁에 함께 있다. 나만 외지에서 일하느라 아직도 주말부부를 하고 있지만…….


그리고 어느 날 나 이우영은 내 아내 곁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취할 것이다. 내 고향은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 344번지.



#에필로그



나는 지금 좋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아주 잘 살아가고 있는, 서산의 영원한 아들이다. 그동안 좋은 일도 많았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늘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고향 팔봉과 우리 재인천서산시민회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내년에도 건강 잘 지키며 더욱 빛나는 향우회가 되길 기원한다.


위풍당당 거침없이 우리 곁에 다시 찾아 온 겨울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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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산시대(http://www.ss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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